의식
지친 마음 위에 핀 작은 생명의 이야기 – 길 고양이와의 9년
힐링푸른별
2025. 5. 30. 15:07
시골에 내려온 지 어느새 9년.
그 시간 속에서 내 인생은 뜻하지 않게 작은 생명들과 얽히며 조금씩 변해갔다.
모든 시작은 평범한 어느 날 마당에서 처음 마주친 길고양이 한 마리였다.
앙상한 몸에 찢어진 눈빛을 한 고양이는,
조심스럽게 내 앞에 다가와 밥 한 줌을 받아갔다.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서툴지만 진심 어린 먹이의 교환이 오가던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인연이 내 삶을 얼마나 흔들고 변화시킬지 말이다.

작은 인연, 큰 전환점
그 고양이는 점점 나의 마당에 자주 나타났다.
어느 날은 닭고기를 삶아 주기도 했고, 어느 날은 고양이 사료를 손에 쥔 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고양이는 임신한 상태로 나타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며칠 뒤, 온몸이 젖어버린 채, 배가 홀쭉해진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그 모습은
말이 아닌 몸으로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몸을 닦아주었다.
산고의 흔적이 털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 순간 느껴진 연민, 안타까움, 책임감.
그리고 내가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의 깊은 감정의 뿌리를 마주했다.
연민과 죄책감 사이의 감정들
그녀의 새끼들이 한 마리씩 마당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도 먹이를 주고, 우유를 준비하고, 병에 걸린 아이들에게는 약도 먹였다.
가끔은 내 작업 공간에서 밤을 지새우며 약한 아이들과 함께였다.
죽음을 앞둔 고양이의 호흡이 멈추는 순간을 함께하며,
나는 수없이 울고, 오열하며, 묻어주었다.
그 감정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한편으론 그 모든 감정을 내가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지치게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 뒤에 도사리고 있던 건 책임과 고통, 그리고 소모된 에너지였다.
중성화와 병원의 벽
어느 날, 하나 남은 여자아이 하나를 중성화 수술을 시키기 위해 병원에 데려갔다.
그 아이만 중성화 시키면 연속되는 출산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검사 결과, 간수치가 너무 높다는 이유로 수술이 불가하다고 했다.
15일분의 약을 먹이고 다시 병원에 데려갔지만 수치는 여전했다.
결국 나는 그 아이의 수술을 포기해야 했다.
그래 이제 너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는 거야.
그 후
내 마음은 점점 고갈되었고, 어느 순간
“이제는 정말 못 하겠어”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돌볼 에너지도 없는 상태에서
계속 누군가를 돌보는 건 너무도 무거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말라붙은 털과 뼈만 남은 한 어미 고양이를 마주했다.
심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얘를 병원에 데려가야 할까?”
“내가 아니면 누가 도와줄까?”
수없이 갈등하다가, 나는 또다시 그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아직도 그곳에 있다
지금도 그 첫 고양이는 가끔 우리 집을 오간다.
그녀의 자손들은 몇 세대를 거쳐 여전히 내 곁에 있다.
나는 여전히 그 아이들을 위한 밥그릇을 준비하고,
작은 생명의 몸짓에 울고 웃는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안다.
이 아이들이 내 삶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었고,
삶의 이유가 되어 주었다는 것을.
길고양이 돌봄은 삶의 한 형태다
길고양이를 돌본다는 건 단순히 먹이를 주는 일이 아니다.
생명을 함께 살아내는 일,
그들의 삶에 내가 끼어드는 일이자,
나의 삶에 그들이 발을 들이는 일이다.
길고양이 돌봄의 현실은 아름답지만 가볍지 않다.
누군가는 무책임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말의 무게도, 책임도,
결국 돌보는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다시, 오늘도 나는 그릇을 채운다
지친 마음 위에 피어난 작은 생명들,
그들은 내 삶에 말을 걸고 있었다.
“괜찮아, 너도 충분히 애썼어.”
나는 오늘도 고양이 그릇에 사료를 채우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배워간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픈 고양이를 마주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일까?”
“이 아이의 생을 모두 책임지는 게, 진짜 사랑일까?”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내 것'으로 품고 살아왔다
.
그들의 아픔도, 상처도, 죽음마저도 내 탓이라 여기며 자책했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책임감은 어느새 감정의 구속이 되어 나를 지치게 했고,
어쩌면 그건 동물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한 나의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생명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살고, 아프고, 죽는 것.
그건 인간도, 고양이도, 나무도, 모두가 겪는 자연의 일부였다.
그제야 조금은 놓을 수 있었다.
무력함이 아니라, 겸손한 순응으로.
사랑하되, 내 에너지와 그들의 에너지를 구분 짓는 건강한 거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을 돌보는 일은 멈추지 않겠지만,
그 돌봄이 나의 존재 자체를 소진시키는 일은 더 이상 아니어야 했다.
이제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오늘도 나는 사료를 챙기고, 마당의 그릇을 채운다.
하지만 예전처럼 모든 것을 짊어진 얼굴은 아니다.
고양이들의 생을 존중하고, 지켜보는 위치에서의 사랑을 택했다.
어떤 아이가 병들어가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면, 이젠 놓아주자.”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안다.
길고양이 돌봄이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내 내면을 마주하고 성장하게 해주는 깊고 고요한 수행의 길이었다는 것을.
나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제는 그렇게 믿는다.
모든 생명은 제 몫의 삶을 살아간다고.
나는 그 여정에 잠시 머물다 가는 동반자일 뿐이라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갈등도, 슬픔도, 이제는 내가 성장하기 위한 과정으로 느껴졌다.
길고양이들과의 인연은 나를 지치게도 했지만,
결국 나를 더 깊게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자연에게 맡기는 용기.
그것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힘이다.